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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are here! Even if Macron doesn't want it, we are here!” - "On est là! Même si Macron ne le veut pas, nous on est là!" ...

2019-07-18

“정말 오랫동안 무심코 기대해왔던 운동” - ‘Rungis 노란 조끼 공동체’ 회원 3명과의 인터뷰 노트. 5월 16일자 ACTA 인터뷰 기사 번역



(Vous trouverez ci-dessous la source originale en français.)

“정말 오랫동안 무심코 기대해왔던 운동”
- ‘Rungis 노란 조끼 공동체’ 회원 3명과의 인터뷰 노트

 ‘활동가 연구 플랫폼’(http://www.platenqmil.com)과 함께 메이데이 전야에, ‘Rungis 노란 조끼 공동체’ 회원 3명을 인터뷰했다. 우리는 긴 인터뷰 텍스트를 공동으로 게시한다. 운동의 파노라마를 살펴보면, 이질적인 사회·지리적 구성으로 개별 공동체는 지난 몇 달간 파리에서의 결집에 중심 역할을 했다. Rungis 노란 조끼 공동체는 일 드 프랑스(Ile-de-France) 지역총회 구성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또한 이 공동체는 지난 1월 26~27일 꼬메흑씨(Commercy)에서 열렸던 제1차 ‘총회들의 총회’ 내에서, 전국적 차원으로 운동을 구조화하는 작업에 참여해왔다.

 이러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지난 12월 야간에 며칠 동안이나 연속으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물류 중심지 Rungis에서 벌어진 물류 흐름 봉쇄투쟁에서 ‘Rungis 공동체’가 출현했다. 우리가 인터뷰했던 3명 중 한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공동체는 역동적으로 “촉수처럼 뻗어나가는(tentaculaire)”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세 사람은 초창기부터 노란 조끼 운동을 끄집어내어, 2011~2013년의 투쟁 사이클로 대표되는 결집과 이 봉기를 서로 구분했다. ‘공간 운동’으로 알려진 그 당시의 투쟁은 대도심과 상징적 공간으로 사회적 갈등을 집중시키는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교통비 인상에 반대하며 모든 대도시를 휩쓸었던 2013년 브라질의 운동으로 막을 내렸다. 이와 반대로, 노란 조끼 운동은 초창기부터 ‘역동적이고 강경한 반대’라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리고 ‘이중 시간성(double temporalité)’에 방점이 찍혔다. Rungis 투쟁 경험이 상징하는 ‘실천적 봉쇄투쟁을 폭넓게 세세한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것’과 대도심에서의 ‘집약적’ 기습 타격투쟁 사이의 조율을 통해, 결집은 실제로 확산되어왔다.

 인터뷰 과정에서, 우리는 삶의 조건, 사회·정치적 궤적, 즉 운동 내부의 ‘주체화(subjectivation)’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이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노란 조끼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파리 교외 지역 주민들의 경험 속에 자리 잡은 한 가지 견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경험과 관점은 활동가뿐만 아니라, 언론 기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확실히 특별하다. 그러나 우리는 노란 조끼 운동에서 그 경험에 입각한 주장과 관점을 통해, 2016년 이전의 투쟁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노란 조끼 운동은 고전적 정치 구조 외부에서 새로운 조직 형태를 통해, 대다수 대중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봉기에 대해 즉각적 관심을 표할 수 있도록 했다.

 "2005년에 저는 11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가끔씩 밤에 큰 오빠와 함께, 집 아랫동네에서 벌어지는 폭동에 참여하기 위해 나갔습니다. 오빠는 저를 보호했습니다. 11살, 그때 처음으로 최루탄을 경험했습니다. ..." 93번 데파르트망(Seine-Saint-Denis)에서 온 Am이 말했다. 또한 Am은 그러한 행동이 정치적으로 여겨질 수 있을지에 대해 궁금해 하면서, 그들이 학교에 불을 지르기로 결의했던 순간을 망설이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Am은 너무 많은 수업과 노동계급 거주지역의 비참한 물적 조건으로 인해, 프랑스의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특징짓는 단적인 사례로써, ‘학교’의 핵심적 역할에 대해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간접적으로 그 질문에 답을 했다.

 인터뷰는 노란 조끼 이전부터 정치적 경험이 있었는지, Leo, Cor, Am에게 질문하며 시작되었다. 3명의 대답 모두에서, 2005~2006년 투쟁 사이클(지역에서의 첫 봉기, 그리고 이후에는 CPE-최초고용계약-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의 중요성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그때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Leo와 Cor는 2005년 11월 봉기를 언급했지만, 이들 3명은 2006년 CPE 반대 투쟁 당시의 고등학교 봉쇄투쟁 참여에 주요 초점을 맞췄다. “제가 학생운동에 참여한 것이 직접적으로 정치적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주로 봉쇄투쟁에 참여했습니다.”라고 Am이 말했다.

 반면에 license(학사학위)를 취득한 Cor은 그 당시의 투쟁이 어떻게든 대학생들과 함께하려고 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Cor은 대학에서 처음으로 매우 다양한 정치적 환경에 열중했었다. “정말 많은 정치적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주변에서 이런 형태의 어떠한 정치적 제안도 받지 못했던 제게는 (정치를) 훈련하는 경험이었습니다. ... 그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AGEN(낭테르 학생 총연합)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대학생활 동안에만 지속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뒤이어 상당한 정치적, 운동적 공백이 이어졌다. 이러한 공백은 Cor가 지방선거에 출마하면서 형성되었던 모임에서만 부분적으로 해소되었을 뿐이다. Cor는 ‘나중에 후회를 했었다’고 말했다.

 한편, Leo는 CPE 반대 투쟁이나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에 몇 번 조용히 참여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형태의 전투적 투쟁에도 전혀 참여해본 경험이 없다고 말했다.

 특히 이주민 지원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좀 더 많은 경험을 가진 Am은 2014년, 가자 지구 침략전쟁과 Barbès에서의 충돌에 맞서기 위한 시위에 참여했었다. : "그러나 정치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우파와 좌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평범한 서민 동네에 사는 주민들에게 그리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 저는 한번,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시켜서 멜랑숑(Melenchon)에게 투표했었습니다."

 우리는 세 사람에게 ‘무엇이 그들을 지난 몇 달 동안 노란 조끼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Leo는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운동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무엇보다도 이 운동은 고전적인 정치, 정당 및 노동조합 외부에서 펼쳐지고, 추상적 요구가 아니라 처음부터 민중들의 삶과 직결되는 주장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깊게 뿌리내린 것으로 이해된다.

 1차 행동이 있던 11월 17일, 샹젤리제에 있던 지인의 페이스북 생중계를 통해, 거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알게 된 Leo는 곧장 거리로 달려갔다. "우선, 저를 처음으로 놀라게 했던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나이였습니다. 대다수는 40대 이상이었습니다."

 운동 초창기에는 더욱 회의적이었던 Cor는 "아시다시피, 그건 백인들의 운동처럼 보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초창기에 Cor는 언론과 거리를 두고, 1차 행동이 펼쳐지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나 그때, “어느 노인이 아무 이유 없이 경찰에 의해 곤봉으로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 나서, 저는 ‘저들이 지금 한계를 넘어서버렸다. 나는 현장에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2차 행동이 이어졌다. 거리에 나서기로 결심한 Cor도 “우리는 평화적으로 시위하려고 현장에 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선제조치를 취하려고 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2차 행동에 역시 함께 했다. 다른 한편으로, 경찰 폭력 장면이 모든 이들이 봉기에 참여하도록 결심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Am 역시 페이스북을 통해, 노란 조끼의 첫 걸음에 함께 했고, 절대 돌아오지 않은 친구와 함께 2차 행동에 참여했었다. 또한 자신에게 유류세 인상 반대 운동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유류세 관련 쟁점이 결정타였습니다. ... 그둘 중 누군가는 노동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 아마 30년 이상 노동해왔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를 보러 갈 여유도 없고, 번듯한 삶을 누릴 수도 없고, 슈퍼마켓에서 값비싼 제품을 구매할 수도 없습니다. ... 작년에는 제가 일하러 가기 위해, 하루에 60km를 이동해야했습니다." Am은 공공 서비스가 취약하고, 비공식 경제(l’économie informelle)를 통해 살아가도록 강제 받는 교외 지역의 열악한 사회적 조건을 자주 강조했다. :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가 훔쳤거나 ‘트럭에서 떨어진’ 것으로 옷을 차려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휴가 역시 항상 문제입니다. 제 부모님은 일 년에 한 번씩 한적한 마을로 휴가를 떠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주 그러지 못했습니다. 돈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모님은 자식들만 보내야했습니다. 평생 동안 노동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Am은 매주 토요일 행동 이외에도, 강력하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93번 데파르트망(Seine-Saint-Denis) 노란 조끼 그룹이 조직한 톨게이트 봉쇄투쟁에 참여하면서, 운동 내에 관계망을 구축해나갔다. Am에게 이러한 과정은 투쟁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Am이 우리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는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였다. : “제가 처음으로 거리에 나갔을 때, 더러운 꼴을 당했습니다. 우파들은 우리를 나쁜 놈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리를 떠야했습니다.”

 이때 쯤, Rungis 진입 방향 톨게이트 봉쇄투쟁이 시작되었다. 10일 연속 밤낮으로 진행되었던 봉쇄투쟁은 유럽의 가장 중요한 물류 중심지에서, 트럭의 출입을 늦추게 했다. “그 밤들은 정말 최고의 사회적 교류, 만남의 순간이었습니다.”라고 Leo가 말했다. 이 투쟁은 원래 Rungis 공동체가 출현했던 다른 곳의 봉쇄투쟁 경험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또한 이러한 봉쇄투쟁은 초창기에는 투쟁에 집단적 참여를 조직하기 위한 도구 역할을 했다. Leo, Am, Cor는 조직 형태에 관한 보다 일반적인 반영으로 시작되었던 (노란 조끼) ‘총회’가 어떻게 결집의 기초를 세우는 진정한 기반이자, 상호인식의 실질적 공간으로 작용했는지 설명했다.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들은 특히 운동이 뻗어나가고 있던 초창기에는 일정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론이 만들어낸 인물이기도 하며, 진정한 지도자는 아닙니다.”라고 Cor가 말했다. Cor에 따르면, Rungis나 일 드 프랑스(Ile-de-France) 노란 조끼 지역 총회에서는 바로 그 ‘가짜 우두머리’의 존재에 대한 토론을 했었다.

 Cor는 노란 조끼가 ‘수평적 성격을 가진 운동이며, 수직적 구조가 아닌 촉수처럼 뻗어나가는(tentaculaire) 운동을 지향’한다는 것을 항상 강조했다. Cor에 따르면, 심지어 운동에 가장 중요한 ‘분노하는 프랑스(La France en Colère)’와 같은 페이스북 그룹조차도, 실질적으로 운동의 중심축이라 여길만한 구심이 없다. 그래서 그들(Leo, Am, Cor)은 우선적으로 정보 확산을 위한 이러한 언론 매체 플랫폼의 중요한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3명 모두 ‘지도자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Leo는 ‘세계주의적(cosmopolite)’ Rungis 총회의 특성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아랍인, 흑인들이 있었고, 이탈리아인도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아시아인만 없었네요!”라고 ‘총회들의 총회(l’Assemblée des assemblées)’ 진행 과정을 설명하고 있던 Cor가 잠시 농담을 했다. Leo는 꼬메흑씨(Commercy)에서 열렸던 제1차 ‘총회들의 총회’ 당시, 대표단 중 한명이었다. Leo는 운동의 전국적 구조를 형성하기 위한 중심 역할을 강조했다. :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며, 챙겨주었습니다. ... 3일 간의 토론을 위해 프랑스 전역에서 200명의 대표단이 왔었습니다. 이전까지 전혀 만나본적 없던 사람들을 그렇게 만난다는 건, 운동에서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세 사람은 무엇이 그들을 계속 투쟁하도록 만드는지, 동기와 목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선적으로, Am은 “핵심적 의제는 구매력입니다. 노동자들이 영화도 보러 가고, 휴가도 떠나면서, 자신의 삶을 잘 꾸려나갈 수 있어야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교외 지역에는 공공 서비스가 충분치 않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심지어 알제리에서조차, 도로가 그렇게 엉망으로 관리되진 않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의 도로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6개월에 한 번씩 타이어를 교체해야합니다. 저는 자동차를 자주 사용합니다. ... 여성들이 다니기에 길은 너무 어둡습니다. 밤에 집으로 갈 때,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맞아요. 진짜에요.” Cor가 말했다. “저는 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 형편없이 어두운 가로등을 지나야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자주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에게 뭔가 두려움의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어서, 우리가 다음의 얘기를 들었을 때, 2등 시민으로 (차별) 대우받고 있다는 생각이 또다시 찾아왔다. : “집에서 강도 사건을 신고했었는데, 경찰은 48시간 뒤에나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타고 올 차량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집에서 아무 것도 건드리지 말고, 2일 동안 머물러야한다고 갑자기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Cor는 좀 더 직접적으로 정치적 얘기를 이어갔다. : “질서를 구축해나가는 유럽연합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5공화국 정치 체제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으로 Cor는 이탈리아의 상황을 환기시키며 극우파의 등장을 언급했다. : “우리는 지중해에서 대학살이 자행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정부는 리비아와 협력하면서, 사람들을 배 밖으로 던져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유럽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정부)가 계속 이러한 행보를 한다면, 예정된 재앙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더 넓게 살펴보자. 이 세 사람을 투쟁으로 이끄는 것은 더 이상 스스로의 생활 조건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자각이다. 따라서 좀 더 나은 물적 조건을 위한 열망이지만, 사회적 관계를 위한 열망이기도 하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Cor가 이를 잘 요약하고 있다. : “이 세상에 살면서, 아침에 깨어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항상 피곤합니다. 항상 노동을 합니다. 밤에 집에 돌아가 잠을 잡니다. 주말에는 잊어버리기 위해 술에 취합니다.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닙니다. ... 우리는 더 많은 걸 원합니다!”


* Source originale en français (프랑스어 원본 출처) :
https://acta.zone/un-mouvement-quon-attendait-inconsciemment-depuis-tres-longtemps-notes-dentretien-avec-trois-membres-du-collectif-gilets-jaunes-de-rungis/

* Versione italiana (이탈리아어 버전) :
https://www.infoaut.org/approfondimenti/un-movimento-che-inconsciamente-attendevamo-da-tanto-tempo-appunti-da-un-intervista-con-gilet-jaunes-dell-assemblea-di-rungis-pari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