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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version - 'We are here', April 24, 2019

“We are here! Even if Macron doesn't want it, we are here!” - "On est là! Même si Macron ne le veut pas, nous on est là!" ...

2019-08-07

"낭트(Nantes) 시위대여, 부끄러워마라!" 8월 3일자 Cerveaux Non Disponibles 기사 번역


 예상대로, 낭트 토요일 시위에선 많은 폭력 행위가 있었다. 거리 의료진, 시위대, 언론인 등이 LBD 고무탄환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 낭트에선 최루 가스 수류탄이 수백차례 발포되었다. 그리고 또한, 거리에서 바리케이드, 불에 탄 기물, 깨진 유리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이 나라 권력자와 모든 강자들은 깨지고 불탄 일부 물건에 집착하며, 시위대 수천 명의 존재를 모욕, 경멸했다. 지난 12월이나 3월 16일 투쟁(르 푸케 레스토랑 방화)과 비슷한 패턴이었다. 그러나 약간 뉘앙스가 애매했다. : 모든 시위대는 스티브에 대한 기억으로 얼룩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지극히 침착하지 않고 시위에 나서는 것은 스티브 유족 입장에 대한 존중 부족일수도 있다.

 보다 많은 대중과 함께 하자는 주장은 간단하고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레미 프헤이스(Rémi Fraisse. 역자 주 1 - 2014년 10월 댐 건설 반대투쟁 도중, 경찰의 수류탄 발포로 인해 살해당함.)의 죽음 이후, 과도하게 제기된 주장이다. 그 당시 레미 어머니는 여러 차례 침착할 것을 요구했고, 모든 폭력을 규탄했다. 스티브 어머니와 유사한 레미 어머니의 반응을 누군가 이해한다면, Wissam(2012년 1월 경찰에 의해 살해당함. 역자 주 2)의 형제 Farid El Yamni가 레미 어머니에게 보냈던 공개편지는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경찰 폭력을 겪었던 수많은 이들은 불행히도, ‘절대적 비폭력 노선이 항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만일, Farid의 말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다면,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의 주장을 살펴보자. : “비폭력, 소극적 저항은 상대방이 우리와 같은 규칙을 지키는 선에서만 효과적이다. 그러나 평화 시위가 폭력적 탄압에 직면한다면, 그 효과는 끝이다. 나에게 비폭력은 도덕적 원칙이 아니라, 전략일 뿐이다. 비효율적 무기를 사용하는 건 도덕적 장점이 아니다.” 몇 년이 흐른 뒤, 마디바(역자 주 3)는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 “투쟁의 형태를 결정(규율)하는 자는 언제나 피억압자가 아니라, 억압자이다. 억압자가 폭력을 사용할 경우, 피억압자도 폭력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3천명, 5천명, 심지어 1만 명의 시위가 완전히 “평화적”으로 일어나는 것에 대해, 권력이 걱정한다고 과연 누가 믿겠는가? 우리는 지난 몇 달간, 마크롱, 카스타너 그리고 뭔가를 바꿀 수 있는 힘과 수단을 가진 권력자들이 수천, 수만, 심지어 수십만 시민의 분노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더욱 심각한 점은 다음과 같다. : 정부가 유일하게 스스로의 입장을 굽혔던 때는 바로, 노란 조끼 시위가 가장 폭력적이었던 시기였다. 그것은 노란 조끼 시위의 여파였다. 즉, 정부는 평화적 시위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오히려 정부가) 시위대로 하여금 더욱 공격적인 방법을 사용하도록 내몰고 있는 것이다. 

 결국 도심 결집, 자동차, 여러 상점 타격 투쟁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점점 줄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그렇다. 온갖 불의와 약간 과도한 재정적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을 보자. 사람들은 여전히 이를 초래한 근본원인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완전한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죽어간다. 사회적 비상사태, 기후 비상사태, 인도주의적 비상사태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사회는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이고 상처 입힌다. 반면에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된다. 이는 말처럼 간단해 보이는 문제이지만, 현실을 보자. 부자조차도 현 상황을 어찌할 수 없는 형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력은 이제 하나의 무기만을 가지고 있다. 바로 탄압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폭력적이며, 거칠어야한다. 탄압은 무서워야한다. 탄압은 가장 온건한 이들로 하여금, 가장 급진적인 이들만을 남겨두고 시위 대오를 이탈하도록 만든다. 이는 시위 대오를 훨씬 더 쉽게 침탈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이러한 메커니즘은 갈수록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토요일 낭트에서, 각자의 방식과 한계를 지닌 시위대 수천 명은 서로 연대했다. 행정당국과 권력은 미묘하게 은폐된 위협을 가하며 시위 금지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스티브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분노를 안고 거리에서 함께 투쟁했다. 바리케이드는 불타올랐고, 깨진 유리창은 번쩍이며 날아다녔다. 엄밀히 말해, 여느 때와 같이 이러한 장면은 바뀐 것이 없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스티브를 위해 울부짖었다. 사람들은 확실히 행정당국이나 카스타너, 마크롱보다 울분에 차있었다.

 그래서 토요일 낭트에 있었던 모든 이들에게 전한다. : 거리를 접수했던 것을 부끄러워마라. 누군가 자신의 분노를 폭력적 방법으로 표출했다고 해서 부끄러워마라. 정작 부끄러워해야할 사람들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고, 그것을 은폐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방관하며 분노하지 않는 자들이다. 여러분, 여러분은 스티브를 추모하고 정의를 요구하기 위해 거리를 접수했다. 여러분은 절대 부끄러워해선 안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극좌파 혹은 노란 조끼가 일으킨 ‘비극’에서 회복하고자 소리치는 이들에게 전한다. : 스티브 실종에 대해 노란 조끼의 첫 분노가 폭발했던 것은 이미 지난 38주 동안 노란 조끼가 맹목적인 국가 폭력에 희생당해왔기 때문이다. 노란 조끼가 겪은 폭력은 경찰의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전적으로 계산된 폭력이다. 또한 이제는 권력 차원의 테러 전략의 일부이다. 노란 조끼는 알고 있다. 점점 더 정의에 재갈이 물려지고 있으며, 독립성은 점점 더 침해당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가족, 친구들과 함께 살아왔다. 수천 명이 부상·절단 당했지만, 경찰은 여전히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내사부(IGPN)나 다른 기관에 의해 은폐되고 있다.

 그렇다. 스티브는 실종되었고, 처음부터 노란 조끼는 크게 분노하여 떨쳐 일어났다. 그리고 #OuEstSteve(#스티브는_어디_있나요) 운동이 거대한 분노로 일어나, 강력해질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부분 노란 조끼 덕분이다. 스티브 유족이 이러한 연대 흐름에 동참하길 원치 않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그 자체가 이러한 국면 전환을 위해, 정의를 추구하고 당국에 압력을 행사하는 수천 명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는 없다. 향후,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스티브, 지네브, 레미, 아다마와 같은 국가 폭력 희생자의 죽음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투쟁은 그저 경찰과 한곳에 있다는 이유로, “허무하게” 살해당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싸움이다. 또한 이 투쟁에서 권력이 테러 전략을 취하며 침묵을 강요할 때, 급진적·공격적 전술을 취해야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움은 민중을 도륙하고, 상처 입히며, 이 체제를 통해 부를 얻어가는 자들의 몫이다.

* Source (출처) :
https://cerveauxnondisponibles.net/2019/08/03/manifestants-nantais-nayez-pas-honte/

* 역자 주 1 : 프랑스 툴루즈 출신의 환경운동가로 댐 건설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다 2014년 10월 26일 경찰이 발포한 수류탄에 의해, 21세의 나이로 살해당했다.

관련하여 <르 몽드>의 기사 참고 :

https://www.lemonde.fr/planete/article/2014/10/31/mort-de-remi-fraisse-la-these-de-la-grenade-offensive-confirmee-par-les-analyses_4516416_3244.html

* 역자 주 2 : 2012년 경찰에게 살해당한 청년의 유족(형제)이, 비폭력 투쟁을 주장하는 레미 어머니에게 2014년 당시, ‘폭력 투쟁의 필요성과 비폭력 투쟁의 한계’를 호소하는 공개편지를 보낸바 있다.

관련하여 <Paris-Luttes.Info> 기사 참고 :
https://paris-luttes.info/lettre-ouverte-a-la-mere-de-remi

* 역자 주 3 : ‘존경받는 어른’이라는 뜻으로, 만델라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호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