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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version - 'We are here', April 24, 2019

“We are here! Even if Macron doesn't want it, we are here!” - "On est là! Même si Macron ne le veut pas, nous on est là!" ...

2019-09-17

"우리의 거리를 되찾는 방법" 9월 10일자 Cerveaux Non Disponibles 기사 번역


 지난 10개월간, 노란 조끼 운동은 권력, 경찰, 미디어, 신문사 등을 여러 차례 놀라게 했다. 노란 조끼의 존재 그 자체를 보라. 노란 조끼의 결의와 변화를 위한 강렬한 욕망 이외에도, 프랑스의 사회적 투쟁 양상이 실제로 변화했고, 이는 완전히 탈중앙화(décentralisées)된 자율적 행동 양상을 보인다. 봉쇄, 점거, 시위, 끓어 넘침(débordements)... 노동조합, 야당, NGO 등 번듯한 기존 구조와 규범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수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2019년 가을, 가능성은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권력과 미디어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끓어 넘쳐 더욱 강력해지려면, 다가올 시위나 여타 실천행동이 어떻든지 간에, 투쟁 전략을 면밀히 살펴야한다. 아래에 몇몇 제안과 고민을 제출한다. 더 다듬어져 풍부하게 완성되기를 바란다. 확실히 중요한 건, 아래의 고민이 명확하게 봉기를 선동하고 심지어 혁명적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이다. 지난 몇 달간, 수많은 노란 조끼와 시민이 봉기, 혁명을 외치고 열망해왔다. 그렇기에 이제는 차분하고도 과감하게, 혁명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래는 시인이자 레지스탕스 르네 샤르(René Char)가 주창한 바와 같이, “원칙적 행동과 전략적 계획”을 위한 일종의 매뉴얼이다.

쪽수의 힘

 쪽수는 언제나 저력을 발휘한다. 특히 이 사실은 최근 몇 달간 프랑스에서, 더욱 더 분명해졌다. : 원칙적으로, 권력에 맞서 진정 위협이 되는 실천을 조직하려면, 꽤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서야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규모 시위 그 자체가 성공을 담보하진 않는다. 최근 몇 달간 기후 시위는 수만 명 혹은 그 이상에 달했지만, 정부와 경제 권력을 위협하진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경찰 폭력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선을 넘어, 더 많은 기동대와 군대(voltigeurs)를 동원하면서 잔혹해지고 있다. 이에 맞서려면, 수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최근 몇 달간, 권력이 실제로 휘청거렸던 때는 언제나 쪽수로 인해, 거리에서 힘의 균형이 노란 조끼에 유리하도록 기울었던 순간이다. 당국은 막대한 인적, 물적 수단을 총동원했지만, 몇 시간 동안이나 시내 곳곳에서 수많은 시위대가 표출하는 분노를 통제할 순 없었다.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확실히 23차 행동(2차 최후통첩)이다. 3월 16일 1차 최후통첩 투쟁에서 공권력의 무력화를 경험한 당국은 시위대의 폭주를 저지하고자,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 최후통첩 페이스북 페이지는 시위 직전, 마지막 순간에 몇몇 집결 장소를 공지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곳에 참여했던 노란 조끼는 수십 명의 CRS(경찰기동대)에게 찍혀 붙잡혔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날뿐만 아니라, 파리 시위에서 노란 조끼의 쪽수는 매우 중요했다. 대규모의 “신고된” 시위가 베흑씨(Bercy) 거리에서 시작되었었다. 당국은 침탈을 계획했고 시위대를 통제하기 쉽도록, 여러 작은 행렬로 분산시키려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위 행렬은 거대했고, 결의에 차있었다. 이로 인해, 경찰 부대는 대열을 재정비해야했다.

 결국, 거리에서 많은 쪽수를 형성하는 것은 시민 불복종 행동에 나서기로 결의한 이들을 사수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게 반드시 폭력적일 필요는 없다. 설령 그들이 실제로 몸을 던져 직접적으로 행동하진 않더라도, 시위대 수천 명의 존재만으로 권력에 정말 위협적이고 골치 아픈 시위를 조직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프랑스에선 이런 맥락의 선봉대가 등장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는 홍콩 봉기이다. 홍콩에서는 이 같은 전략이 굉장한 수준으로 구사되고 있으며, 기층의 “풀뿌리” 시위대는 최전선 시위대를 위한 필수 요소이다.

 향후 몇 주 간, 주요 이슈는 11월, 12월에 이처럼 거대한 결집을 조직해내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가능하다. 노란 조끼 행동에 적어도 한번 이상 참여했던 사람은 아무도 정부의 술책에 현혹되지 않는다. 일부가 거리로 나서지 않는 이유는 사회·경제 상황에 대한 의견 변화가 아니라, 피로감 혹은 경찰 폭력, 체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게다가, 저항할 수 있는 여지는 1년 전보다 훨씬 더 크다. 모든 노란 조끼가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주변을 보자. : 요즘 누가 마크롱과 그들만의 세상에 만족하는가? 기후와 사회적 위기 상황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누구인가? 다가오는 시위에 친구와 가족이 거리에 나설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야한다.

즐거움과 상상력

 오늘날 노란 조끼 시위에서 눈에 띄는 점은 반복성과 지속성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운동의 성공을 담보하는 건 도시, 거리 점거 투쟁을 혁신하는 창의력이다. 새로운 목소리, 새로운 운동 방식, 기습적 경제 봉쇄 투쟁(ex : 샹젤리제) 등. 심지어 언어조차도 재창조되었고, 기존의 사회적 투쟁 방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 우리는 n차 “행동(actes)”과 이에 뒤따른 ‘최후통첩’ 투쟁을 재치 있게 만들어내었다. 노란 조끼는 스스로의 투쟁 일정, 투쟁 영역을 기획하며 고유한 투쟁 방식으로 함께해왔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한편, 노란 조끼가 로터리를 점거했을 당시, 모두가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톨게이트를 점거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노란 조끼가 매주 토요일, 도심에서 집결하기로 결의하는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노란 조끼의 외침이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왔을 때, 이는 작은 승리와도 같았다. 다양한 상호 교류, 의사소통, 표현의 공간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권력은 언제나 대중의 눈을 속이려한다. 그리고 선거 혹은 제도화된 투쟁(노동조합, 정당, NGO 등)을 통한 분노 표출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는 믿음을 주입시키려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인생은 거대한 놀이터이며, 도시 역시 마찬가지이다.

 권력을 혼란에 빠트리는 지점은 서로 알아가며 행복하게 투쟁하는 사람의 존재 그 자체이다. 권력은 시위를 억압하고자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지만, 시위 현장은 만남, 인생, 광기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소부르주아지의 안주하는 삶 속에서는 알 수 없는 그 모든 것... 따라서 거리에 기쁨, 광기, 열정,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중요하다. 다른 이들 역시 잿빛 꿈을 깨고, 우리와 즐겁게 함께하기를 바란다. 이들은 불탄 자동차와 은행을 넘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미 이해하고 있다. 혁명의 핵심은 파괴가 아니라, 만남, 공조, 교류, 건설에 있다.

휴대폰은 이제 그만, 더 많은 연대를!

 봉기의 기운이 가장 달아오른 순간, 특히 경찰 폭력과 진압이 몰아치는 순간에는, 권력이 은폐하려는 현실을 드러내고, 거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진과 영상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요즘엔 최악의 경찰 진압 순간에 상황이 더욱 나빠질 수 있음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휴대폰만을 꺼내든다. 이들은 여전히 운동을 지지하는 편에 서있다. 그러나 이들은 휴대폰으로 상황을 촬영함으로써, 실제 행동하고 있는 시위대로부터 분리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더 이상 실질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관객이 된다. 우리는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사람, 수십 명의 시위대가 그 현장을 촬영하는 동안,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 영상을 얼마나 많이 목도했는가? 이들을 재단하고, 가치판단을 하려는 건 아니다.

 개개인은 시위를 포함, 각자가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를 촬영하고 싶은 마음은 꽤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론으로 현상을 분석하고, 이것이 전체 운동에 어떻게 작용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위와 같은 경향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촬영만 할 뿐 실질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경향은 우리 투쟁의 전투성, 연대성을 탈각시키기 때문에, 권력에 이롭다는 점을 깨달아야한다. 그리고 때때로 위와 같은 영상이 시위대에게 입은 피해를 추궁하기 위한, 증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따라서 휴대폰을 치우고, 향후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한다. 노래, 달리기, 낙서, 현수막 제작, 다른 시위대에게 정보 전달, 행동 제안 등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다. 우리가 휴대폰 화면만으로 시위를 지켜볼 때, 더 이상 할 수 없었던 수많은 행동이 가능하다.

다양한 실천에 대한 존중

 봉기로 불타오르려는 시위 현장에서, 전투적 행동의 수위, 장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 누구도 타격 투쟁의 도덕적 정당성을 정확히 규정하여 한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질문은 매우 복잡하고 민감한 사안이다. 우리 모두는 ‘모든 불법 행위가 비윤리적’이라는 사회가 주입한 도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역자 주 : 지난 3월 16일 투쟁으로 인해) 불에 탄 르 푸케(Le Fouquet's) 레스토랑이, 이윤 증대를 위해 노동자를 해고하는 사장보다 심각하진 않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를 부수거나 불태우는 것이 반드시 투쟁과 관련 있거나, 혁명적 전진을 담보하진 않는다.

 우리는 시위대 그 자체가 매도당하거나, 악영향을 받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조심해야한다. 투쟁을 재평가하면서도, 사실상 타격 투쟁과 폭력행위 일체를 덮어놓고 옹호하는 역편향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때때로, 특정 상황과 맥락에서는 공공기물·상점 타격, 경찰 공격 등이 전술적 오류일 수 있으며, 저들의 진압을 자극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훼손이나 폭력은 투쟁의 성공여부를 측정하는 지표가 아니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전투적 실천 행동은 불탄 자동차, 약탈된 은행 등 직접적인 결과라기보다, 더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도구일 뿐이다. 이미지와 겉모습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권력은 스스로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다른 대안은 없다’는 환상에 의해 유지될 뿐이다. 전투적 실천 행동은 이와 같은 환상을 깨부수기 위한 투쟁에 적용될 때, 비로소 유의미하다. 이는 경찰, 군인 수천 명이 배치되었음에도, 파리 전체가 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일 때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준에 도달하려면, 상황에 맞는 조건을 형성해야한다.

 또한 반드시 폭력적이지 않아도, 매우 전복적인 형태로 봉기, 타격투쟁이 가능함을 명심해야한다. 수천 명의 순환도로, 선로, 관공서 점거 역시 마찬가지로 권력에 타격을 가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시위대를 폭력, 비폭력으로 구분 짓는 프레임을 거부해야한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만이, 이렇게 완전히 인위적인 구별에 관심을 둘 뿐이다. 이러한 구분(낙인)은 손쉬운 지배 도구이다. 폭력은 그렇게 비윤리적이지 않다. 역사책에서조차 ‘악’과 맞서 싸운 레지스탕스 투쟁의 위대함을 자랑스레 다루고 있다. 폭력을 수반하여, 말 그대로 진정으로 ‘투쟁’했다.

실시간 적응

 시위대가 높은 기동력, 공격성을 띤 경찰 부대, 새로운 “질서 유지” 전략과 마주했을 때엔, 어느 때보다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상황에 발 빠르게 적응해야한다. 홍콩의 경우, 경찰과의 전선이 너무 과열되면 시위대는 지체하지 않고, 발 빠르게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투쟁을 이어간다. 그러한 상황에서, 특히 지도부가 없고 완전히 수평적인 운동에서, 집단적 의사결정은 매우 어렵지만 효과를 발휘한다. 그리고 종종, 오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만있는 것보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동”하는 것이 더 낫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경찰과의 대치가 전혀 전략적이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걸 명심해야한다. 힘의 균형이 확실히 일방적으로 기울었을 땐, 시위대의 공간 점거, 봉쇄, 전투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대체 방안을 생각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의 목적은 경찰이 아니다. 경찰은 우리의 목적 달성을 저지하려는 권력의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경찰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면, 투쟁을 훨씬 더 아름답고 건설적으로 만드는데 방해될 뿐이다.

* Source (출처) :
https://cerveauxnondisponibles.net/2019/09/10/reprendre_nos_ru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