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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are here! Even if Macron doesn't want it, we are here!” - "On est là! Même si Macron ne le veut pas, nous on est là!" ...

2019-02-04

그들이 노란 조끼를 입은 이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9년 1월호 한국어판 Dossier면 ‘노란 조끼, 제 2의 68혁명?’ 기사 중 요약 발췌.

그들이 노란 조끼를 입은 이유

이번 2018년 12월 15일, 파리 오페라 극장 앞에서 세 명의 ‘노란 조끼’들이 ‘프랑스 국민들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향한 연설문을 번갈아 낭독했다. “이 운동은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하는 운동입니다. 이것은 40년 전부터 자신들의 미래와 명예를 꿈꿀 수 있게 해준 모든 것들을 박탈당한 국민들의 외침입니다.”

“... 지난 40년간 집권했던 프랑스의 거대 양당을 한 남성이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지 1년이 지난 이 시점에, 국민들은 미래를 빼앗겼다고 말할 정도다. ...”

“... 그는 다른 이들의 경제적 처우는 철저히 무시한 채 자신의 직감에만 의존했다. 대선 기간 외쳤던 사회적 고민거리는 단지 장식일 뿐이었고, ... 그런데다 ‘예전의 분노’까지 더해지자 새로운 현상이 발생했다. 바로 크리스토프 카스타너 내무장관이 ‘괴물’이라 명명한 것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이들은 이제 못 할 것이 없다.
‘노란 조끼’ 시위와 1936년 6월에 발생한 노동자 파업은 프랑스 내 좌파세력이 무시당하자 촉발된 운동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이미 고위층들은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과 그들의 요구에 크게 놀란 경험이 있다. “노예의 삶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운동을 일으키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과거 프랑스 철학가이자 노동운동가인 시몬 베유가 토로했다. “이 운동에는 별도의 요구사항들, 물론 이 요구사항들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 그것은 바로, 우리 노동자들이 수개월, 수년 동안 웅크려 지낸 채 모든 고통과 시련을 조용히 감내하고, 이제는 당당히 맞서서 바로 서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발언권은 이들에게 있습니다.”...”

“... 프랑스 정치가 레옹 블룸 역시 주 40시간 근무제도와 임금 인상, 유급휴가 제도를 도입한 마티뇽 협정을 언급하면서, 두 경영자들 간의 대화를 전한 바 있다. ...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어떻게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있었지? ... 과연 마크롱 대통령도 ‘노란 조끼’ 시위대에서 말한 그들의 일상을 듣고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

“... 이제는 ‘노란 조끼’ 덕분에 현 정부가 시행한 불공정한 정책을 모두가 잘 알게 됐다. 구체적인 정책으로는, 2017년 적용된 주택보조금(APL) 월 5유로 감액, 부유세(ISF) 철폐와 같은 부유층들을 위한 점진적인 세금철폐 등이 있으며 이로 인해 은퇴자들의 구매력이 감소했다. ... 세액공제(CICE) 방식을 단순화함에 따라 내년부터 프랑스 정부는 유럽의 최고 부자인 베르나르 아르노(까르푸, LVMH 그룹 회장이자 일간지 <르 파리지앙>, 경제일간지 <레제코>의 소유주)에게 돈을 2배 더 쥐어주는 꼴이 됐다.
이 금액은 약 400억 유로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프랑스 GDP의 1.8%에 해당한다. 또한 감액된 주택보조금의 10배 이상에 달하는 금액이다. ‘노란 조끼’ 시위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5분 남짓의 정부 비판 영상에서 자클린 무로씨가 “프랑스 사람들의 현금을 거둬 무엇을 하느냐?”고 재차 물었는데, 마크롱의 이런 정책들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

“... 과도한 유류세 인상과 더욱 깐깐해진 차량 정기검진 등 모든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 다른 정치체제 하에서 강요됐던 것들을 마크롱 정부도 그대로 답습했고, 심지어 그는 이 새로운 세계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안은 아니다. 고학력자, 부르주아, 대도시 거주자들은 마크롱 대통령의 낙관주의에 공감한다. 국가가 희망을 잃어가는 동안, 이 세상과 미래는 이들의 것이 됐다. 1970년대에는 작은 주택이라도 소유한다는 것은 신분상승의 상징이었고, 이를 한 ‘노란 조끼’가 신랄하게 조롱했다. “비행기가 낮은 고도로 우리 땅 위를 지나갈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지.”
- 자! 저들이 여행을 떠나는 파리지앵들이야. 저 파리지앵들이 우리에게 등유를 남겨줬어!
에마뉘엘 마크롱은 이제 유럽연합과 같은 다른 부르주아들의 지원을 기대해볼 수 있을 듯하다. ... 유럽연합은 프랑스 없이는 존립할 수 없으며, 그리스처럼 프랑스에 벌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 유럽연합과 독일은 프랑스를 예의 주시하며 계속 지원할 것이다. ... 2019년 재정적자는 유럽연합(EU)이 정한 상한선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3%를 상회할 전망이다.”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사람들의 불만에 대처하고자’ 프랑스 대통령의 후퇴에 응원을 보냈다. 좌파 측 역시 비위를 맞추기 위해 시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잇속을 채익려는 부르주아 집단들은 단결에 돌입했다. ‘마크롱 부대’를 수호하고자, 사측조차도 (그들의 대통려잉 최저임금까지 올리려고 하자) 기업들에 직원들의 특별수당 지급을 요구했다. ...”

“... 우리는 이들의 소망이 실현되는 것을 막을 뿐이다. 마크롱 대통령의 권력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마크롱에게 절의(節義)를 지키는 앙마르슈의 의원들과 제5공화국 체제에 의해 그의 권력은 회복됐고,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가 보여준 자유주의는 파리에 장갑차를 투입하고, 수백 명의 시위자들(12월 18일에는 1,723명)을 체포하는 데에 전혀 주저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

“... 프랑스 정부는 국제적 규모의 조직으로서는 취약한 ‘노란 조끼’의 상황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대통령의 희망사항과, 경제·문화계 부유층의 밀접한 공생관계는, 대통령의 개인적인 변덕에 따라 국정 운영 방향을 신속히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줬다. ...”

“... 프랑스는 이제 돈이 없고, 공기관은 유럽정책에 따라야 하며, 예산은 독일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됐다. 이것은 EU와 협상한 사항이다. .. 최근 포드(Ford) 사례를 보면, 정부의 무능함을 목격할 수 있다. 미국 다국적 기업 포드의 회장은 프랑스 보르도 인근의 블랑크포르(Blanquefort)에 위치한 공장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고, 이로 인해 800명의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됐다. 공장폐쇄를 발표한 후에도 포드사 회장은 프랑스 정부에 연락조차 취하지 않았다. 20년 전, 1997~1998년 동안 발생한 실업자 시위에서 참가자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 ... ”본 시위를 통해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실업자들이 맞닥뜨린 다양한 사회 문제들(실업자들을 향한 무시, 무관심 등)을 뿌리 뽑았다.“ ...
실업자 시위만큼 ‘기적적’이고, 더욱 강력했던 ‘노란 조끼’의 출현을 통해, 점점 심화되는 빈곤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대표를 선출해 진행했던 기존 시위에 절대적인 불신을 느낀 ‘노란 조끼’들은 그 어떤 대표자나 대변인, 당파, 조합 없이 시위를 열었고, 엘리트들을 배제하고 미디어와 싸워 나갔다. 비단 프랑스 정부뿐만 아니라 다른 정부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에, 정부의 폭력에도 지켜냈던 이 원칙이 ‘노란 조끼’ 인기에 한몫을 했다. ...”

“...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문화적으로도 생소한 시위의 향방을 점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정치적 관점은 불분명하고, 시시때때로 바뀌는 특성 때문에 단결을 이루거나 위력을 발휘하기는 더욱 어렵다. 노동자와 중산층 간의 합의가 쉽게 이루어지는 순간은, 유류세 인상이나 부유세 철폐가 반대에 부딪혔을 때 혹은 최저임금 상승으로 소상공인들 걱정이 커졌을 때다. 하지만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될 수도 있다. 이는 ‘노란 조끼’들의 요구사항인 불평등, 임금, 세금, 공공기관의 쇠퇴, 위협받는 자연환경, 미디어와 정치 분야에서 과하게 대표성을 지니는 고학력 부르주아 등의 특성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을 때 가능하다.
2010년, 프랑수아 뤼팽 기자가 프랑스 도시 아미앵에서 같은 날 서로 엇갈려 지나가는 두 진보주의 시위 행렬을 묘사한 바 있다. 한쪽은 ‘굿이어(Goodyear)’사 노동자 행렬이었고, 다른 한쪽은 스페인의 안티페미니즘 법에 반대하는 탈세계화 시위 행렬이었다. ‘불과 6km 떨어진 두 곳은 전혀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한 노동자의 비꼬는 듯한 말투를 빌리면, 공장의 강경파와 시내에서 산책을 즐기는 부르주아 사이에 연대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같은 시기에, 사회학자 릭 판타지아 역시 미국 디트로이트에 나타난 ‘서로 모른 체하는 좌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쪽은 정치적 관점이 없었으며, 다른 한쪽은 실행에 옮길 의지가 없었다. 비록 아미앵과 디트로이트에서 목도된 분열이 서로 관련은 없다고 할지라도, 극단성은 사회질서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지식인들에 의해 촉발된 분쟁의 세계와, 구타로 고통받고 이를 되갚으려고 하는 서민 세계 사이의 균열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노란 조끼’ 시위가 상기시켜준 것 역시 이런 분열이었다.
이제, 혼자서는 싸울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 글 : 세르주 알리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 번역 : 장혜진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 출처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9년 1월호 한국어판 Dossier면 ‘노란 조끼, 제 2의 68혁명?’ 기사 중 요약 발췌.